MAGAZINE / LIFESTYLE
2019. 12
아버지가 남긴
딸의 기록
사진으로 지은 찬란한 기억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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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순간을 남기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기억할 이야기이자
역사가 되기도 한다. 고故 전몽각 선생은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바쳐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프레임에 담은 사진집 <윤미네 집>은 어쩌면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서사시다.
가족의 탄생,
기록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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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 사진가 전몽각 선생은 딸의 탄생부터 렌즈에 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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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윤미 씨의 백일 무렵이다.
1964년 12월. 한 해가 며칠밖에 남지 않은 날, 아기 ‘윤미’가 태어났다. 그해 12월에 윤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이는 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순간, 전몽각 선생에게 윤미는 우주이자 전부였다. 단순히 벅차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첫아이라는 기쁨과 혈육이라는 존재를 만난 신비로움에 그저 놀라워하던 그는 눈도 뜨지 않은 갓난아이 앞에 카메라를 대고 셔터를 눌렀다.

이후 젖을 빠는 모습, 할아버지 댁에 나들이 갈 때,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모습, 엄마나 형제들과 뒹구는 모습과 같은 당연하고도 사소한 장면부터 학교 입학과 졸업, 대학 합격 발표가 있던 날, 연애하는 모습, 결혼 날짜를 정하고 시집가는 날까지 무려 26년간 윤미의 삶 모든 순간이 카메라에 담겼다.

전몽각 선생은 집에만 들어오면 늘 품에 카메라를 안고 살았다. 전문적인 사진작가가 아니었기에 그의 사진에는 플래시를 터트리거나 빛을 조절하는 등 기교도 없고, 세련되고 멋들어진 구도도 없다. 카메라 자체가 귀했던 시절이라 이렇다 할 현상 공간도 없어 집 화장실에 암실을 마련해 직접 현상하고 프린트했다. 겨우 현상한 사진에는 스크래치와 먼지가 가득했고, 오래 보관한 필름에는 곰팡이가 끼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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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교 없이 투박하게 쌓아온 <윤미네 집> 사진들은
마치 매일 기억나는 대로 적어놓은 일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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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다르지 않은 이 모든 것이 <윤미네 집>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기록의 힘은 기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특별하지 않아서
더욱 특별한 우리 집
“안고 업고, 뒹굴었고 비비대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간질이고 꼬집고 깨물어가며 아이들을 키웠다.” –<윤미네 집>책머리에 中

언제나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쏟았던 전몽각 선생은 사진을 찍을 때만큼은 ‘충실한 방관자’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집 안에서 편안하게 움직인다고 하지만, 아이들만큼 역동적인 존재는 없을 것이다. 다 같아 보여도 자세히 보면 결코 그렇지 않은 게 아이들의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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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새로움에 눈뜰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아무리 뛰어난 예술가도 할 수 없는 표현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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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면 아이들이 귀여워 늘 카메라를 들이댄 아버지의 모습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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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에는 갈현동 주택에서 펼쳐진
일상의 온기가 느껴진다.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이 눈에 띄는 자식들의 유년 시절, 남들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작은 변화를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전몽각 선생은 혼자 수많은 필름을 축냈다. 그만큼 한 컷도 놓치기 아까운 장면들이었다.

사진에 담기던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좁디좁은 8평 아파트를 떠나 정착한 서울 은평구 갈현동 집은 전몽각 선생이 직접 만든 집이었다. 그곳에서 20년 동안 살며 그는 집 안 구석구석 한 곳도 빠짐없이 사진에 담았다. 마당에서 아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던 때, 보라색 등꽃이 피고 지던 테라스, 키 큰 후박나무가 보이던 넓은 창, 그 창에 담기던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 전몽각 선생에게 가장 좋은 모델은 집의 모든 것, 모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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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안에는 없지만 렌즈 너머에는 언제나 아버지 전몽각 선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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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결혼하고 유학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의 사진은 계속 이어졌다.
평범한 일상이
역사로 뒤바뀌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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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성장 안에는 결국 한 시대의 흐름이 담기기 마련이다.
<윤미네 집>에는 ‘윤미’뿐만 아니라 한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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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의 기록이 시작된 1960년대 중반은 한국전쟁의 상처가 남은 시기라 국민의 생활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전몽각 선생네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윤미네 집>에 담긴 사진 곳곳에는 단칸방 살림살이, 연탄 불, 비포장도로, 둥그런 소반 등등 각박한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마치 어린 생명과도 같은 여리고 상처 많은 시대가 성장하며 점차 바뀌어가는 모습은 전몽각 선생이 무심한 시선으로 담아낸 윤미네 가족의 변화와는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기에 가장 짧은 시간을 남기지만, 그 기록의 힘은 세계를 뒤흔들 만큼 강하다. 더군다나 그것들이 한 제목으로 묶이면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평범한 가족사진 속에 담긴 우리나라의 1960년대와 그 시대 서민의 생활, 그리고 한 인간의 성장 이야기는 이제 교과서에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중요한 역사서로 탈바꿈했다.

<윤미네 집>의 주인공 전윤미 씨는 이제 많은 사람에게 특별해진 자신의 가족 앨범이 “아버지가 보내시는 응원과 사랑”이자, “돌아갈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그리움”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녀를 인터뷰한 전 <포토넷> 정은정 기자는 “선생에게 사진은 잊혀져삶의 소중한 기억들을 되살리는 기록이었다”고 전한다.

사진을 넘어 영상과 VR(가상현실)까지 기록하는 방법이 넘쳐나는 시대다. 기록이 무언가를 천천히 바라보고 소중히 간직하는 것이라면 과연 우리는 진짜 기록을 하고 있는 걸까.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본 단 한 순간의 기록, 그러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진 한 장이 여전히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울림을 주는 이유를 생각해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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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사진은 모든 가족에게 추억의 한 장면이다.
글. 류민정 에디터 사진 제공.
<윤미네 집>(전몽각 지음, 포토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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